저자 홍창우
국문초록 이 글은 우리나라의 후삼국시대에 권력 창출에 성공했던 왕건을 중심으로, ‘도선’이 당대에 활용되었던 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본 시도이다.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한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다(918). 그리고 신라의 귀부를 받아낸 뒤(935) 후백제를 패멸시켜 재현된 삼국시대의 종지부를 찍었다(936). 474년을 향유한 고려라는 새로운 권력을 출범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고려가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전투적 역량이 우월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습적 폭력 수단에 의지한 권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왕건은 자신이 섬기는 군주를 죽이고 왕이 된 인물이었다. 당시는 신라를 대체할 적임자가 자신임을 정교하고 세련된 형태로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시대였다.
이에 왕건을 위시한 새 왕조에서 주목한 것은 도선이었다. 비교적 후발주자라 할 수 있는 왕건에게는 후삼국 쟁탈전에서 자신이 최종 승자가 되어야만 했던 까닭이 필요했다. 이에 왕건 가문의 거처에는 지세상(地勢上) 성현이 탄생한다는 ‘풍수’와 ‘예언’의 맥락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지덕론(地德論)에 따라 왕건의 ‘송악’을 중심으로 기존의 질서를 재편해야 한다는 논리가 구축되었다. 이는 도선의 풍수가 왕건에 의해 독점된 결과인 것이다.
근대 역사학의 출범 이후 도선과 관련한 여러 자료들이 소개ㆍ정리되는 과정에서 이를 둘러싼 숱한 의혹들이 제기되었다. 그 가운데 자료의 생득적 한계를 들어 도선의 ‘실재’를 회의하는 시선들을 살펴본 결과 그 근거가 취약함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도선의 존재가 부정될 경우, 도선이라는 이름으로 거둔 모든 역사적 소산과 사유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주제어 : 후삼국시대, 도선, 풍수지리, 도참, 왕건, 견훤, 궁예, 권력 창출, 훈요십조, 「선각국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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